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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 왕조 제25대 왕 철종 조선 왕조의 정치적 혼란 세도정치

by 빛난다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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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제25대 왕 철종 조선 왕조의 정치적 혼란 세도정치

 

조선 왕조 제25대 왕 철종

 

 

----------  목차 ----------

1. 철종

2. 철종의 친정

3. 마무리

1) 철종

 

조선왕조 제25대 왕 (재위 기간 1849~1863) 1844년 가족과 함께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1849년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정치에 어둡고 외척인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습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서손자이자 전계대원군 이광의 셋째 아들입니다.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나 은언군과 상계군 사건과 이복 형 원경의 옥사로 교동도와 강화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뒤 왕족으로서의 예우를 박탈당하고 평민처럼 생활하였습니다. 강화도로 유배 된 후 농업과 나무꾼, 행상으로 살던 중 184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궁중에 들어와 덕원군에 책봉되었으며, 1849년 19세로 헌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습니다.


철종은 5촌 당숙인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즉위 직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였고, 사실상 실권은 안동김씨에게 있었습니다. 1851년(철종 2년)의 7촌 조카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 왕후)로 맞아들였습니다. 이로써 순조, 헌종, 철종 세 임금의 중전이 안동 김씨 가문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궁전은 안동 김씨의 소유이다라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김문근을 위시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학문적인 소양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정사는 세도가들에 의해 처리되었고, 철종 자신도 스스로 이것을 인식하고 술과 궁녀를 계속 가까이하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매관매직(관직을 사고 팜)으로 관직에 오르게 된 사림이 많았습니다.

 

 1858년 철종에게는 유일한 적장자 이용준이 태어났지만 6개월 만에 사망하였고, 후궁들에게서 얻은 아들들 또한 영아기에 사망하였습니다. 자녀 중 유일하게 혼례를 치른 영혜 옹주 또한 14세에 사망하여 그의 후손은 단절되었습니다.

2) 철종의 친정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이때도 실권은 안동 김씨 세력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1859년 관리들의 부정비리를 지적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습니다. 1854년 철종 5년에는 제주도의 과거시험 합격자들이 육지로 상경하지 않고 제주도에서 받을 수 있도록, 승정원의 관리가 제주도로 파견되어 합격증서, 교지, 어사화를 지급하게도 하였습니다.

1861년에는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 소속의 마보군과 별기군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 숙위 강화를 시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안동 김씨 세력의 세도가 강하여 그는 자기 뜻을 제대로 펼칠 수 없었습니다.

1857년(철종 8년) 8월 10일 지돈녕 이학수, 영중추부사 정원용 등의 건의에 따라 양아버지 순조를 순종에서 '이단을 배척하여 서학(천주교)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서란(홍경래의 난)을 평정한 공'을 기려 묘호를 종에서 조로 바꾸어 순조로 개정하였습니다.

 

철종은 정치에 어둡고,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극심한 민생고를 유발,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 등지에서 대규모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조정에서는 속출하는 민란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기존의 조선 통치 기강이 무너지고 삼정의 문란은 더욱 심해져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졌으며, 결국 1862년 진주민란을 시발점으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농민봉기라 총칭합니다. 철종은 봉기 발생 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히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고, 농민의 요구 조건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하였습니다.

 

농민 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1862년 5월 이후에는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의 개혁을 공포하고 재야 유생층과 관료들에게 개혁책을 모집하였습니다. 이때 발표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며, 각종 부가세를 혁파하고 도결이나 방결을 폐지하였으며 환곡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가운데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한편 1860년 경주 지방의 잔반인 최제우가 만든 신흥 종교인 동학이 창시되어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조정에서는 이를 탄압하고 교주인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처형하였습니다. 천주교 또한 민중 속에서 계속 유행하고 있었으며, 조정에서는 이 또한 탄압하였습니다. 철종 조에는 안동김씨 세력이 세도정치를 행하고 있었으므로, 조선의 조정은 천주교에 대해 관대하였습니다.

 

이 같은 사회정세에서 최제우가 주장한 동학사상은 학정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놀라운 속도로 파급,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었으며, 만민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의 사상도 일반 민중은 물론 실세한 양반층에까지 침투되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철종은 결국 재위 14년간 세도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색에 빠져 정치를 바로잡지 못한 채 1864년 1월 16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의 나이에 병사하였습니다. 능은 예릉입니다. 철종 역시 후사가 없이 사망하였으므로 효종의 실제 직계 남자 후손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은 효종의 동생 인평대군의 종손가에서 태어났으나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3) 마무리

 

TV 드라마에 철종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임금님의 첫사랑', '풍운', '대원군', '바람과 구름과 비', '철인 왕후' 등 드라마 주제로 많이 다뤄졌다는 것은 철종 재위 기간에 다양한 스토리들이 많았겠지요. 농사를 짓다 갑자기 왕이 되었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래서 정치를 하는 것이 많이 부담되고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좀 더 잘하려고 노력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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