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조선의 불가사의하고 논란이 많은 조선의 제10대 임금
조선의 제10대 임금 연산군에 대해서는 역대 왕 중에서 많은 관심의 집중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조선 왕조에서 복잡하면서 흥미를 불러일으킨 부분이 많아 늘 연구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산군에게 긍정적인 면은 없는 지 등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목차 ------------
1. 연산군
2. 연산군의 역사적 의미
3. 마무리
1) 연산군
연산군은 조선 왕조의 제10대 왕(재위 1494~1506)으로서 많은 신진 관료를 죽이는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년에 일어났던 사화)를 일으키고 생모 윤 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명을 살해하였습니다. 또한 경연을 없애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비정이 극에 달하여 결국 중종반정(1506년에 조선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몰아내고 배다른 아우인 진성대군(중종)을 임금의 자리에 올린 사건)에 의해 폐왕이 되었습니다.
연산군은 1476년(성종 7년) 11월 7일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의 맏아들(적장자)로 출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후궁이었다가 성종의 총애를 받아 왕비에 오른 윤 씨입니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첫 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이름은 이융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서연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연산군은 제10대 왕으로 즉위한 후 신승선, 노사신 등 대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으나, 선왕의 명복을 비는 불교식 행사인 수륙재 시행과 외척의 등용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유생들과 갈등을 빚었고 즉위 1년 후 생모인 윤 씨가 사망하게 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방치된 윤 씨 능묘 천장을 두고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와 대립하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은 연산군과 삼사 사이에 더욱 갈등과 대립 속으로 치달았습니다. 연산군 재위 4년인 1498년 7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의 내용이 세조를 비판하고 붕당을 만들어 국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조의제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를 문제로 삼아 훈구파 이극돈, 유지광 등은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으며, 이미 죽은 김종직을 부관참시(죽은 뒤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을 다시 내린 사건: 연산군 때 김종직, 송흠, 한명회, 정여창, 남효은, 성현 등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습니다)하고 많은 신진 사류와 삼사에 속한 대간들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왕이었던 연산군과 갈등을 빚으며 왕권을 견제했던 삼사의 역할은 축소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왕(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이에 따라 국고의 낭비가 아주 심해졌습니다. 1504년에는 손녀를 궁중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던 홍귀달이 숙청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생모인 폐비 윤 씨의 문제로 번졌습니다. 성종의 후궁인 정 씨, 엄 씨의 모함으로 윤 씨가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 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죽이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습니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이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 구결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습니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 채청사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에 빠졌습니다. 경연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그 실정은 극에 달하였습니다.
급기야 1506년(중종 1년) 훈구파를 중심으로 연산군을 폐위하려는 정변이 계획되었고 이에 이조참판 성희안, 중추부지사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켰으며 연산군은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습니다. 실록에는 연산군으로 강봉 되어 폐위된 지 두 달 만에 역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 왕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선조 이후 정치 세력들이 붕당으로 갈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파 대립으로 인해 국력은 소진되었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국난으로 국운은 더욱 쇠퇴하였습니다.
2) 연산군의 역사적 의미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폐위되기까지 2년 반 동안은 그야말로 극심한 폭정이 휩쓴 황당무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에 왕은 모든 행동에 제약받지 않고 자신이 갈망한 전제 왕권을 완전히 누릴 수 있었지만, 수많은 편집증적 심리와 행동에서 보이듯이 그의 내면은 그만큼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연산군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척결하려는 목표로 삼사를 포함한 신하 전체를 길들이려는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런 실패는 본인에게는 깊은 상처로 남았지만,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기묘사화(1519년:중종 14년)가 보여주듯이 삼사의 기능이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과정이 남아있었습니다.
연산군의 격동적인 치세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은 예술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조선 왕조의 문화 태피리스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문학, 예술 그리고 철학에 대한 부분을 연구하면서 그 시대 연산군의 폭정 속에서도 번성했던 문화를 한번 찾아보세요. 연산군은 그의 치세를 감쌌던 정치적 음모와 숙청, 논쟁을 파헤쳐 보면 당대인들의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3) 마무리
연산군은 복잡하고 다각적인 통치자로 한국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당시에도 가정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 줍니다. 아마 연산군은 어릴 때부터 생모에 대한 원망과 갈망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역사적으로는 폭군으로 남아 있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궁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쳤지 않았을까요?
무척 외로웠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그가 남긴 사실들은 끔찍했죠.
연산군을 평가하는 데는 많은 논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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